제1장 자유의 과거와 현재
당신은 언제 자유로운가?
풀린고삐
조금만 생각해보면 풀린 고삐는 말에게도 인간에게도 최선의 자유를 실현해주지 못한다. 말의 고삐를 느슨하게 쥐고 있다는건 내가 방향을 잡기 위해 딱히 고삐를 사용하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마침 우연히도 말이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을 때만이 아니라 특별히 가려는 방향이 없을 때에도 나는 말이 가고 싶은 대로 내버려둔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안장에 앉아 있으며, 어느 때고 마음이 바뀌면 다시 고삐를 틀어쥘 수 있다. 지금은 말을 조종하고 있지 않지만 잠재적이고 유예된 통제를 누리고 있다. p.47-48
독립된 인간으로의 열망, 공화주의 개념
시민이란 왕이나 귀족과 같은 권력자가 부과한 법이 아니라, 시민의 통제를 받는 법으로 보호받는 자다. 이러한 로마인들의 사고방식에 따르면 "완전한 자유란 시민권과 거의 동일하다". 자유롭다는 말과 시민이라는 말은 본질적으로 같은 말이다.p.51
로마 공화정
로마 공화주의 전통은 시민의 동등한 법적 지위를 강조했기에 어떤 시민도 다른 시민보다 더 큰 법적 권한을 지니지 못하게 했다. 사람들 사이의 수평적인 관계로 시민을 보호하고자 한 것이다. 동시에 이런 법적 지위는 법에 대한 통제권을 행사할 때도 평등하다. 어떤 군주나 엘리트가 특정 의지나 기호에 따라 법을 마음대로 재단하게 두지 않았다. 그러한 평등은 국가 또는 그 국가를 운영하는 정부와의 수직적 관계에서도 시민을 보호했다. 공화정은 이런 이유에서 다음과 같이 개념화되었다. 즉 공화정은 법 앞에서의 그리고 법위에서의 평등이라는 이념에 기초해서 조직된 공동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p.54
중세와 르네상스의 공화주의
마키아벨리 이후, 공화주의와 관련된 주장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첫째, 비지배 자유라는 이상이 정치사회적 삶에서 가장 우선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둘째, 그러한 이상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혼합정체가 요구된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셋째, 그러한 헌정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평범한 시민도 공적인 권력을 견제할 수 있어야 하고 기꺼이 견제하려는 의지를 지녀야 한다는 주장이다. 즉 어떤 형태의 권위 앞에서도 그들은 자신들의 자유로운 지위를 주장할 수 있어야 하고 또 주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때 비지배 자유는 궁극적인 목적이다. 혼합정체는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그리고 공적인 권력을 견제하는 시민은 그러한 혼합정체를 유지하기 위한 필수적인 수단이다. p.57
17-18세기 공화주의
대표 없이 과세 없다
미국인들은 대다수 영국인과 달리 자신들의 대표를 선출할 수 없었다. 당연히 대표를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니지 못했다. 그래서 "대표 없이 과세 없다"는 슬로건이 나온 것이다. (생략) "영국인이 1페니를 납부하도록 강요할 수 있는 동일한 권력으로 언젠가는 미국인이 가진 마지막 페니까지 납부하도록 강요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 한쪽은 자기 마음대로 세금을 부과하고, 다른 한쪽은 소박하게 청원이나 할 수밖에 없는 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
루소의 공화주의 이념
루소는 주권적 인민의 의회에 모든 개개인이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개인의 독립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전체로서의 공동체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루소는 시민은 "다른 어느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아야 하지만" 이는 각 시민이 "공동체에 극도로 의존하게 할 때에만 가능하다"라고 했다. (생략) 루소는 "각자는 자신을 전체에 양도함으로써 그 스스로를 누구에게도 내어주지 않게 된다"는 충격적인 슬로건을 의도적으로 내걸었다. (생략) 루소가 주장한 공화주의 사상은 공동체주의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의 공화주의 사상은 시민 의회로 구현된 공동체가 인민의 자유를 수호하는 게 주요 골자다. 그러면서 적어도 시민 의회가 공공선을 위해 기능하면 공동체 자체는 자유에 대한 위협요소가 아니라고 제안했다. 공동체는 단지 일반의지만을 부과하기 때문에 그 공동체가 그러한 의지를 공유하는 사람들을 지배할 수 없다는 것이다. p.61-62
공화주의의 퇴조
첫 번째 단계, 공화주의를 대체한 새로운 자유 이념
새로운 자유 개념에 따르면 어떤 식으로든 선택의 자유는 지배의 부재가 아니라 규제나 간섭의 부재만을 요구할 따름이었다. 즉 '풀린 고삐'의 상태에서도 충분히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벤담은 모든 것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원리를 따라야 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국가는 단지 엘리트 시민의 자유만이 아니라 모든 심니의 집단적, 개인적 자유를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주장을 하는 와중에 자유가 단지 '규제의 부재'에 있다는 인상을 남기게 되었다. 그는 타인에 대한 권력의 행사를 자제하고 있을 뿐인 상태도 사라져야 한다는, 더욱 강한 의미의 자유 개념을 의식적으로 거부했다.p.65
공화주의의 퇴조
두 번째 단계, 자유를 선택할 수 있는 범위
원하는 영역에서 원하는 자유 선택하기
기존의 공화주의 관점에서는 법이나 관습으로 이미 계약 조건이 분명하게 명시된 어떤 역할이나 관계의 수락 여부를 결정할 자유를 의미했다. 만일 당신이 자유롭게 결혼할 수 있다면, 이는 상식적으로 배우자로서의 의무와 권리를 수락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다는 의미이지 그러한 의무나 권리의 내용을 자유롭게 협상해 결정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생략) 그러나 새로운 자유 개념에 따라 계약의 자유는 훨씬 급진적인 방식으로 해석되기 시작했다. 자유란 기존에 이미 정해진 역할이나 관계를 받아들이는 것뿐만 아니라 그러한 지위나 소속의 조건을 협상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이렇게 자유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사람들은 계약에 따라 협상한 내용이 아니라면 어떤 제약도 따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p.69
이러한 생각이 등장하면서 자유라는 대의는 매우 상이한 양상을 띄게 되었다.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은 모든 제약을 분명하게 제거하는 것이 자유의 이상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권력이 있든 없든 사람들이 관계를 설정하고 상호부조를 제공하는 다양한 조건을 협상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국가의 강압적, 일방적 간섭을 최소화할 것을 요구했다. 그들은 경제적 자유를 위해, 나아가 사회를 위해 더욱 많은 탈규제 정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p.71
'임금노예'와 근대 자유주의
어른들 그리고 공장이 노예 수용소보다 나을 게 없다고 생각했다. 어른들 그리고 당연히 아이들은 그들보다 형편이 나은 사람들의 지배를 받아들이는 것 이외에 더 나은 대안을 찾지 못했다. 그들은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이 항상 강조했던 것처럼 자유롭게 제시된 고용조건에 서명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맺은 계약은 고용주가 고용인을 대하는 방식을 결정할 때 무제한의 재량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p.71-72
이러한 조건이 비재바 자유를 위협한다고 여긴 공화주의자들은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이 환영한 계약의 자유를 거부했다. 산업노동자들을 '임금노예'상태로 전락시켰다는 이유로 그러한 계약 양태를 거부했다. p.72
공화주의, 자유주의, 자유방임주의
고전적 자유주의와 근대 자유주의(존스튜어트 밀)는 자유를 불간섭 내지는 방임과 동일시한다. 그러나 두 자유주의 역시 공화주의처럼 자유를 정치적 삶에서 가장 중요한 또는 핵심적인 이상으로 간주한다. 고전적 자유주의가 불간섭 자유를 정치적 삶의 유일한 가치로 삼았다면, 근대 자유주의는 가치의 초점을 좀 더 확대했다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p.74-75
자유주의
자유주의도 크게 두 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다. 첫째, 자유를 유일한 가치로 볼 것인지에 관한 정도의 차이다. 자유를 유일한 가치로 여기면 우파정책으로 기울고, 다른 가치와 균형을 이뤄야 한다고 여기면 물질적 평등과 또 다른 종류의 평등에 관해 좌파정책으로 기울게 된다. 둘째, 헌법적 질서, 즉 법치, 분권 그리고 기본권을 자유만큼이나 중시하는지 아니면 그러한 질서를 떠받치는 다른 가치를 강조하는지에 따라 관점이 달라진다.
따라서 자유주의 사상은 크게 세 개의 주요 범주로 나뉜다. 전형적인 우파 자유방임주의자들은 불간섭 자유를 유일한 가치로 여기며 헌법적 질서에 대해서는 별로 말하지 않는다. 소수이기는 하지만 좌파 자유방임주의자들도 있다. 이들은 불간섭 자유를 중시하지만 물질적 평등, 특히 지구를 공유하는 일에서는 평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헌정적 자유주의자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은 자유와 평등 모두 중요하며, 법치, 분권 그리고 기본권과 같은 헌정체제 역시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통상 북미에서 자유주의라 부르는 것은 헌정적 자유주의다. 이들을 대표하는 근래의 걸출한 이론가가 롤스와 로널드 드워킨이다. 헌정적 자유주의는 공화주의적인 뿌리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17세기 영국 사상가인 존 로크와 18세기 독일 철학자인 임마누엘 칸트를 중요하게 여긴다. p.76
자유방임주의
자유방임주의자들은 사회 속의 개인을 보호하는 법과 규범이 단지 그의 상태가 되도록 자연적 자유에 근접하도록 하는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생략) 그러나 공화주의자들에 따르면 자유는 사회를 전제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자유는 사회 안에서 당신의 기본적 자유가 타인의 권력에 침해당하지 않도록 보장하는 데 달려 있다. 이러한 자유는 보통 자연적 자유와 구분되며 시민적 자유라 부른다. 이 사고방식에 따르면 사회의 법과 규범은 자유가 요구하는 안전을 제공함으로써 자유를 증진한다. 법과 규범은 자유의 이상에 더욱 근접하게 해주는 인과적 수단이나 장치가 아니다. 단지 자유를 위해 필요한 안전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법과 규범은 자유를 구성하는 방도일 따름이다. p.77
공화주의
즉 법과 규범은 기본적 자유의 영역에서 받을 수 있는 잠재적 간섭에서 당신을 보호한다. 그리고 단지 존재함으로써 입헌적 방식으로 당신을 자유롭게 한다. 법과 규범은 작동되는 순간부터 당신을 보호하고, 당신에게 권능을 부여하는 힘의 영역에 당신을 통합시키고, 당신이 자유를 향유하게 한다. p.78
법과 규범에 대한 상이한 생각
한편(자유주의)에서는 그 근원을 황량한 광야에서의 자유와 같은 자연적 자유로 상정하는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그 근원을 정치공동체에서의 자유와 같은 시민적 자유에서 찾는다.
공화주의 기획
자유주의는 자산이 있는 주류 남성만이 아니라 모든 구성원을 포괄해야 함을 인정함으로써 커다란 진전을 이루었다. 공화주의가 어떤 형태로 부활하든 이러한 발전은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끝내 주저한 벤담과 페일리처럼 멈추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포괄적 시민성이 단순히 불간섭의 자유뿐 아니라 비지배 자유를 향유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해야 하고 삶의 모든 기초적인 선택에서 그러한 자유를 향유할 수 있어야한다고 주장해야 한다.
'왜 다시 자유인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왜 다시 자유인가?』필립 페팃-제1부 자유의 이념:제3장 자유의 폭 (0) | 2020.04.23 |
---|---|
『왜 다시 자유인가?』필립 페팃-제1부 자유의 이념:제2장 자유의 깊이 (0) | 2020.04.21 |
『왜 다시 자유인가?』필립 페팃-한국 독자를 위하여,옮긴이의 말, 머릿말 (0) | 2020.04.17 |